정치,외교

文 김일성의 빨치산항일운동도 애국이라고 하지 않고..?

도형 김민상 2019. 6. 9. 14:53
728x90

공산주의 무장 독립운동 했는데 이런 자가 국군 창설의 뿌리라니 어이가 없다.

) --> 

문재인이 김원봉이 이끌었던 독립운동 단체가 국군 창설의 뿌리라고 했는데 이 말은 참 억지주장이었다. 임정에서도 인정하지 않았던 김원봉에 대해서 찬양을 하는 문재인을 보면서 좌익운동권이 써준 원고대로 읽느냐고 고생을 참 많이 한다는 생각에 연민이 생긴다.

) --> 

임정의 김구 선생은 좌파로 기운 김원봉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조선일보가 68일 전했다. 김구 선생은 1930년대 김원봉이 있는 대일전선 통일동맹에 대해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보인다그런 통일운동에는 참가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 --> 

또 김원봉이 임시정부를 눈엣가시로 생각한다임시정부 취소운동이 극렬했다‘(백범일지362쪽 나남출판사)고 썼다. 일본군 학병에 끌려갔다가 탈출한 장준하의 증언도 있다.

) --> 

잡지 사상계편집인인 그는 문재인 대통령이 재작년 그의 42주기 추모식에 현직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추도사를 보냈을 만큼 존경하는 인물이다. 장준하는 임정이 있던 충칭(重慶))을 향하던 학병들을 상대로 김원봉 휘하 부대가 이간질했다고 자전적 수필 돌베개에 썼다.

) --> 

장준하는 김약산(원봉)은 그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 구축해보려고 공작을 하며. 충칭행을 막았다는 것이다. ‘김원봉은 판에 박힌 공산분자(돌베개 229)’라는 게 문재인이 존경하는 장준하의 결론이었다.

) --> 

문재인이 현충일 추모사에서 “1945년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마지막 5년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에서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는 19411210일 광복군을 앞세워 일제와의 전면전을 선포했습니다라고 하였다.

) --> 

임시정부에 좌파들은 별로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누가 좌우합작을 이뤘고 광복군을 창설했다는 것인가? 그러면서 광복군에는 무정부주의 세력 한국청년공작대에 이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편입되어 마침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습니다란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 --> 

문재인은 이어 그 힘으로 1943, 영국군과 함께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고,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모두 거짓인 것으로 보인다.

) --> 

조선일보는 68일자 기사에서 이를 사실과 다르다고 전했다. 문재인이 약산 김원봉 선생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돼 마침내 독립운동 역량을 집결했다통합된 광복군은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고 나아가 한·미 동맹의 토대가 됐다고 말했다.

) --> 

김원봉과 조선의용대가 국군과 한·미 동맹으로 연결되는 것처럼 읽힐 수 있게 말을 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 -->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들어온 것은 1942년 여름이었다. 임시정부를 줄곧 비판했던 김원봉은 1930년대 말 중국 장제스 정부로부터 임정과의 항일 합작을 종용받았지만 뿌리쳤다는 것이다.

) --> 

그러나 장제스 정부가 재정 지원을 임정으로 단일화한다는 방침을 밝히자 뜻을 굽혔다, 게다가 19416월 조선의용대 병력의 80% 이상인 화북지대가 중국 공산당 관할 지역으로 넘어가자 그는 남은 병력을 이끌고 할 수 없이 광복군 합류했다.

) --> 

그러므로 문재인이 말한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해서 독립운동역량을 집결했다는 말은 거짓으로 추정이 된다.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된 뒤에도 광복군 주류와 섞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 --> 

광복군 제1지대에 조선의용군이 편입되었지만 해방직전 제1지대(50여 명)는 제2지대(200여명), 3지대(300여 명)에 비해 떨어졌다. 그리고 미국은 조선의용대 출신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 --> 

1945년 봄 미국 OSS(전략정보국)가 한반도 침투 특수훈련을 실시했을 때 대상자들은 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에서 선발됐다는 것이다. 미군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던 이범석 제2지대장과 긴밀한 협조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다.

) --> 

문재인이 현충일 추도사에서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어 민족의 독립운동역량이 집결했다며, 1945년에는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함께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는 것은 상당히 어폐가 있다.

) --> 

또한 국군 창설에 기여한 광복군도 제2지대와 제3지대 출신이었다. 특히 제2지대는 이범석을 중심으로 강한 결속력을 보여서 환국 후 우파 청년운동을 벌인 조선민족청년단(족청)에 적극 참여했다.

) --> 

이범석이 대한민국 초대 총리 겸 국방장관이 되자 육군사관학교에 대거 입교하여 훗날 국군의 중추가 됐다. 반면 제1지대 출신으로 국군에 이렇다 할 활약을 한 사람은 없다. 허동현 경희대 교수는 광복군에 뒤늦게 가담해 별 역할도 없었던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문재인이) 부각시키는 것을 지청천과 이범석 등 광복군 핵심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 --> 

김원봉을 좌익들이 월북이 해방 후 친일파 경찰에 체포돼 심문받은 수모 등을 겪어 불가피했다고 주장해 왔는데 이를 뒤집는 증거가 나왔다. 김원봉은 자발적으로 월북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미국 기밀문서가 7일 발견됐다.

) --> 

6·25 당시 미 극동군과 제8군을 주축으로 편성됐던 주한유엔 유격군은 전쟁 기간 빨치산 관련 첩보 보고서를 작성해 본국 국방부에 전달했다. 국회도서관이 소장 중인 300여쪽의 이 보고서엔 김원봉관련 항목이 포함돼 있다.

) --> 

1953319일 자 보고서는 김원봉의 월북 경위에 대해 스스로를 좌파(leftist)로 인식했고, 삼촌(uncle·실제론 인척)인 김두봉(북한 초대 국가수반)과의 관계 때문에 서울을 떠나 1946(실제론 1948) 월북했다고 기록돼 있다는 것이다.

) --> 

이 보고서는 김원봉의 광복군 경력을 언급하며 중국 공산당 지도자 저우런라이의 설득에 넘어간 김원봉이 중국 남동부의 국민당군(Nationalists)을 지원하는 대신, 중국 북부의 중공군 공산주의자(Communists)를 지원했다는 부분도 들어 있다.

) --> 

김원봉은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7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공화국 남반부 해방지역 군면리 인민위원회 선거 중앙선거지도부를 구성했는데 9명의 지도부 중 첫 번째로 김원봉의 이름을 올렸다.

) --> 

6·25 전쟁 초반 북한이 점령한 대한민국 영토에서 우리 정부의 권력기관을 철폐하고 북한 통치 체제를 이식하는 고위 안정화 작업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렇게 스스로 월북해 6·25 공훈으로 김일성 훈장까지 받은 인물을 우리 대통령이 6·25 순국 영령을 기리는 현충일에 국군의 뿌리로 거론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 --> 

여기까지 보면 김원봉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위해서 항일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위해서 항일운동을 했고 광복 후엔 스스로 월북하여 대한민국을 공산화 만드는 작전에 공을 세워 김일성 훈장까지 받은 인물로 대한민국 국군을 죽이는데 앞장선 김원봉을 문재인이 현충일에 국군의 뿌리라고 치켜세운 것은 문재인의 사상이 김원봉과 동색이라고 한다면 과언일까?

) --> 

김민상